용기를 내야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 당장 마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합리화해선 안된다.
그럼 나중에 몇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 순간이 지나면 기회가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많다.
지난주 금요일에 선생님께 소견서를 써달라고 하지 못해서 나는 어제도, 오늘도 병원에 전화를 해야했다.
대학병원이기에 쉽게 만나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병원을 그만두시게 된 사정을 말씀하시는데, 체념하듯한 목소리가 너무 슬퍼보여서 진료가 끝난 선생님을 차마 불러세울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꼭 부탁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다.
고민하던 찰나에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게 다음 예약 날짜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의사 선생님을 불러세웠어야 했는데...
의사선생님을 불러야하는 것을 알지만 그러지 못하며 갈등하는 내게,
다가오는 간호사선생님이 내게는 좋은 합리화거리였다.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지금 의사선생님을 잡지 않으면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용기를 내는 건 정말 어렵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구겨야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나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상담을 한창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대표님과 대화로 직접했어야했다.
문서화한 형태의 반박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을 것 같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이야기, 그들에게는 싫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말로 직접하는게 너무 두려워서,
피하고 싶어서 글로 전했다.
지하철에서 사피엔스를 읽던 그 남자,
정말 내 이상형이었는데 말을 한 번 걸어볼 용기가 없었다.
아니면 말고, 어차피 손해볼 것도 없는데 나는 자존심이 다치는 것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
영영 볼 수 없겠지.
이렇게 용기를 내어 내가 나를 위해 결심해야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 순간들을 더 곱씹으면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나여도 나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사랑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한다.
언제나 상성성을 유지한 상태로 빠르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 실행해야한다.
지금 내가 용기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